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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역사문화

군산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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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사시대
  • 삼국시대
  • 고려시대
  • 조선시대
  • 일제강점기

선사시대

  • 구석기시대
    • 구석기시대는 석기(石器) 즉 돌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최초의 시대를 말한다. 인류의 역사에서는 250만년 전에서 약 1만년 전까지 시기를 말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약 70만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지역의 구석기유적은 대부분 금강, 섬진강 등 강가에 형성되었다. 군산의 구석기유적은 2002년 군산 내흥동 군산-장항 철도연결사업구간 제6공구 지역 지표면 3m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금강하구에 자리한 내흥동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는 대체로 유문암과 석영으로 만든 몸돌, 밀개, 격지 등으로 우리나라 구석기 편년 중 후기구석기에 해당한다.
  • 신석기시대
    • 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의 뗀석기에 비하여 돌을 정교하게 갈아 만든 간석기가 사용된 시기로 우리나라는 약 1만년 전부터 기원전 2,000년 경까지 사이에 해당된다. 군산의 신석기 문화는 바다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해안가와 섬에 형성된 조개무지가 특징적이다. 특히 군장국가산업단지에서 20여개소의 조개무지가 발굴조사되어 군산의 신석기 문화상이 밝혀졌다. 군산 비응도 조개무지에서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화층에서 토기류와 함께 두개골이 없는 상태로 인골 6기가 수습되었다. 군산 가도와 노래섬 조개무지에서는 빗살무늬토기부터 회청색 경질토기까지 다양한 토기류가 출토됨으로써 군산지역 토기류의 발전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보여 주었다.
  • 청동기시대
    •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천 년경에 시작되었는데 이전 시기(구석기, 신석기)의 도구인 석기와 달리 금속인 청동기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향상되고 강력한 무력을 지닌 집단이 출현했다. 청동기시대 군산지역의 문화적 특징은 지석묘와 석관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무덤이 새롭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개정면 아동리와 임피면 축산리에서는 풍화암반층을 장방형으로 파내고 그 안에 판석형 할석을 잇대어 놓은 다수의 석관묘와 옹관묘가 조사되었다. 또한 오성산 등 여러 곳에서 10여 기의 지석묘가 분포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고창군 등 서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해 지석묘의 밀집도가 매우 낮다. 아마도 그것은 이 지역의 거주민이 지석묘보다 석관묘 혹은 옹관묘를 주된 묘제로 사용하던 세력집단이었음을 추정케 한다.

삼국시대

  • 삼한시대
    • 삼한시대(원삼국시대)는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전환하는 서력기원 전후부터 기원후 300년경까지의 과도기적 시기이다. 이 시기 군산지역은 삼한(三韓)중 한곳인 마한(馬韓)의 54개 소국 중에서 두세 곳의 소국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군산의 오성산 기슭에 자리한 성산면 남전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의 구덩식 집자리 9기와 조개무지가 조사되었는데, 특히 조개무지에서는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6세기까지 7개 문화층에서 기종이 다양한 토기류와 철기류,골각기,패각류 등이 출토되었다.
  • 삼국시대
    • 군산지역이 삼국에 포함되는 시기는 기원후 369년 백제의 근초고왕이 마한지역을 공략하여 백제에 편입되면서 부터이다. 이때부터 군산지역은 백제의 지방행정구역에 포함되어 시산군(현 임피), 부부리현(현 회현), 마서량현(현 옥구)으로 불리게 되었다. 대야면 산월리유적은 마한이 백제에 어떻게 복속되었는가와 당시의 사회상을 밝히는데 단서를 제공하는 집자리와 구덩식 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되었다. 성산면 여방리 고분군, 도암리 고분군 등 이 시기 무덤유적과 유물은 군산지역이 백제가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후 백제의 대내외 관문으로서 발전했음을 짐작케 한다. 이 시기 조성된 군산지역에 밀집된 관방유적(산성과 봉수대) 역시 백제에서 군산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증명해 준다.

고려시대

  •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 현장
    • 통일신라 경덕왕 16년 임피군, 옥구현, 회미현으로 변경된 군산의 행정구역은 고려시대 다시 옥구는 옥산으로, 회미는 연강으로, 임피는 취성현으로 변경되었고, 옥구현 옆에 문창현이 새로이 설치되어 네 개의 현이 존재했다. 이후 고려 중기인 인종 21년에 문창현은 폐현되고 임피현의 기능이 중요시되어 김제지역인 만경, 부윤(富潤)현 지역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더욱이 990년 고려 왕조가 국가의 근본인 조세제도를 시행하며, 임피의 조종포에 백성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세곡(稅穀)을 저장 운반하는 조운 창고를 설치하고 이후 전국 12조창의 한곳인 진성창을 임피현 창안에 설치하여, 군산은 서해중부지역 물류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산의 역할은 고려 우왕 6년 8월 왜구의 대규모 침입의 원인이 되었고, 군산은 최무선 장군이 세계 최조로 함포를 이용하여 왜선 500여척을 무찌르는 진포대첩의 현장이 되었다.
  • 국제교류의 관문 군산도
    • ‘군산’이라는 지명의 고향인 군산도(선유도)는 금강과 만경강, 동진강 물줄기가 한데 모이는 곳에 위치하여 줄곧 해상교통의 중심역할을 했다. 백제시대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중국왕조들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며 국제외교의 관문으로서 큰 번영을 누렸다. 1123년 6월에 군산도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편찬한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개경에 가는 길목인 군산도(선유도)를 방문한 사신일행과 이들을 영접한 김부식(『삼국사기』편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군산도(선유도)의 망주봉 주변에는 숭산행궁을 비롯하여 사신을 맞이하던 군산정, 바다신에게 제사를 드리던 오룡묘와 불교사원인 자복사, 객관인 관아 등 많은 건물들이 있었다.
  • 해저유물
    • 우리나라 서해안, 특히 군산 해역은 예부터 한ㆍ중ㆍ일을 연결하는 주요 해상로 일뿐 아니라 사신선, 또는 조세나 공물을 개경이나 한양으로 운반하는 조운선의 중요한 기항지였다. 따라서 군산 해역에는 많은 선박들이 왕래하였고, 풍랑에 의해 난파되는 선박도 많았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해역에서 유물이 발견 신고 된 곳은 230여 곳에 이르며, 이 중 183곳이 서해안에 해당된다. 또한 군산지역에서는 20여건 이상의 해저유물 발견 신고가 이루어졌으며, 이를 계기로 비안도ㆍ십이동파도ㆍ야미도 해역에서는 대규모 해저유물 발굴이 이루어졌다. 이들 해저유물은 이 지역이 과거 해상물류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들이다.

      야미도 해저발굴은 고려청자를 밀매하다 붙잡힌 도굴범의 자백에 의해, 2006년 4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야미도 근해에서 이루어졌다. 발굴결과, 4,800여점의 청자를 인양했으며, 이들 청자는 지방관아나 서민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생산지는 잘 알려진 강진, 부안 등의 요지가 아니라 그 외 지역에서 12세기에 구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까지 이와 같은 조질(粗質) 청자가 해저유적에서 발굴된 예가 없어, 서민 생활용 청자의 생산과 유통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로 의미가 크다. 또한 야미도 해저유물은 비안도ㆍ십이동파도 해저유물과 함께 군산 해역의 해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십이동파도 해저유물 발굴은 한 어부의 신고에 의해, 고군산도 북서쪽 십이동파도 안품 해역에서 2003년 10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이루어졌다. 발굴결과, 고려청자 8,100여점과 그것을 싣고 가던 고려시대 침몰선 1척이 인양되었다. 발굴된 청자는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에 전남 해남군 화원면 신덕리 요(窯)에서 구워져 개경의 관청에 공급되던 자기로 추정된다. 또한 함께 인양한 침몰선은 전기 고려선박 구조를 살펴볼 수 있고, 고려시대 청자의 유통 및 선적방법, 그리고 운송해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비안도 해저유물 발굴은 한 어부의 신고가 계기가 되어, 비안도 북동쪽 1km 해역에서 2002년 4월부터 9월까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대접, 접시, 발(鉢), 통형잔, 완(), 잔, 합(盒) 등 고려청자 3,177점이 인양되었다. 이 해역은 '새만금간척사업'을 위한 물막이 공사 때문에 빠른 물살이 형성되었고, 이로 인해 바다 속의 지형이 변하면서 유물들이 드러난 것이다. 이들 청자는 12세기 후반 고려청자 전성기에 부안에서 구워진 것으로, 운반선을 이용하여 개경으로 공급되던 자기로 추정되나, 그 선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시대

  • 군산의 명칭과 최호장군
    • 조선시대 군산은 태조 4년에 회미현을 옥구현과 병합하여 옥구와 임피현 중심의 행정체제로 정비되었다. 또한 태조 6년 옥구현에 종3품 병마첨절제사가 관할하는 진이 설치될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후 세종 때에는 군산도(선유도)의 수군부대인 군산진을 옥구현 진포(현 군산내항)로 이전하여, 이후 진포를 군산이라 칭하고 군산도(선유도)는 고군산이라 칭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이 지역 출신 인물로는 임진왜란의 명장 충원공 최호장군을 들 수 있다. 최호장군은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고, 정유재란 때 칠전량해전에서 62세의 나이로 전사한 영웅이다.
  • 조선시대 군산의 사람들
    • 조선시대 군산지역 주민들은 옥구(회현), 임피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씨족 마을을 구성하고 살았다. 대표적인 문중으로는 옥구지역의 고, 두, 문, 전, 강, 박, 김, 서, 반씨 등과 임피 지역의 이, 진, 채, 황, 최, 김,심씨 등이 있었다. 18C 중엽에 제작된『해동지도』에는 옥구현의 인구가 4,338가구에 14,000여 명(남자 6,589명 여자가 7,832명) 임피현은 4,317가구에 22,794명(남자 9,896명 여자 12,898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토산품으로는 옥구지역은 대하, 대해, 조기, 전어, 웅어, 차, 생강, 임피지역은 대(竹), 닥나무, 뽕나무, 게, 가시연밥, 도미, 뱅어 등이 생산되었다.
  • 조선시대 군산창
    • 조선 초(1487)에는 진성창을 대신하여 옥구현 북면(현 박물관 인근 지역)에 군산창이 설치되었고, 1500년대에는 호남의 중요한 조운창고로 거듭나게 되었다. 군산창이 호남의 중심 조창이 된 이유는 군산이 서해와 만나는 금강하구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 군산창은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개 읍의 세금을 보관하게 되었고, 7읍의 조세가 모인다는 의미인 ‘칠읍해창’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조운선과 수많은 장삿배 및 어선이 왕래하던 군산창과 군산포는 호남최고의 항구가 되었고 상업 활동이 활발해져 근대도시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 군산진
    • 고려말 조선초까지 서해안 일대는 왜구의 노략질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조선왕조는 군산도에 수군 진(鎭)을 설치하였고, 이후 세종 8년(1426)에 군산진 이라는 이름으로 옥구현 북면지역인 진포(오늘날의 군산)에 이전하였다. 진포의 군산진은 군산진성을 갖춘 병영이었다. 군산진에는 중함 4척, 별함 4척의 전함과 군사 461명, 초공 4명이 근무하였으며 정6품인 수군만호가 있어 관리했다. 이순신 장군은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호남의 경제적 중요성을 높이 생각했는데 이러한 호남의 수호자가 바로 수군부대인 군산진이었다.
  • 객  주
    • 객주는 전국 각지의 상품이 모이는 거점에서 상품을 위탁받아 팔아주거나 매매를 주선하며 창고업, 화물수송업, 금융업 등의 기능을 겸하였던 중간상인을 말한다. 군산은 교통의 중심지이자 전라도의 조세가 모이는 곳이었기 때문에 상업이 발달하고 객주도 많았다. 군산의 객주들은 군산창과 군산포, 죽성리포, 경포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군산이 개항하던 1899년 군산의 객주들은 일제의 세력을 막아내고자 영흥사를 설립했다. 영흥사는 동업 객주의 업무를 조정하고 관과 연락을 행하며 수세상납을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만들어진 상회사이다. 군산의 객주들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교육사업을 지원하며 일본의 침략에 대항했다.

일제강점기

도시의 역사
  • 군산의 개항과 변화
    • 조선시대 군산은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이 모이는 군산창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군산진이 설치되어 경제,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1899년 5월 1일 군산항의 개항과 더불어 해안일대에 조계지를 설치하고, 개항장을 관리하는 옥구감리서를 두었다. 대한제국은 군산 조계지가 일본에 독점되지 않도록 각국의 공동조계지로 정했으나, 개항이후 군산은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종속되어 왜곡된 성장을 겪었다. 군산의 성장과 함께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충청 ㆍ 전라 ㆍ 경상도의 농민과 지식인, 자산가들은 새로운 삶터를 찾아 군산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키려했을 뿐 아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차별받는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 군산 조계지의 설정
    • 조계지란 개항장에서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 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지역인데, 군산조계지는 1899년에 형성되어 1914년까지 존속되었다. 군산조계지를 설정한 뒤 한국인들의 가옥과 묘지는 철거되고, 공공용지를 제외한 지역은 경매로 거래되었다. 조계지는 조선시대 군산창과 군산진이 위치했던 군산내항 인근을 중심으로 동서 구릉지 사이의 평지에 격자형의 구조로 조성되었다. 군산진이 위치했던 자리에 일본 영사관을 두고 이곳을 중심으로 종으로는 1조통에서 9조통까지, 횡으로는 중심 간선도로에 본정통(현재의 해망로)이라는 일본도시의 가로명을 붙이며 도시를 형성해 갔다.
  • 도시의 성장
    • 일제 강점기 군산은 조계지를 원형으로 해서 확장되어갔다. 본정통(혼마찌)을 중심으로 관공서 및 은행, 회사 등이 들어선 상업, 업무지구가 형성되었고 동남부의 군산역 부근에는 정미업을 중심으로 하는 공업지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도로와 건물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군산항에 운반되어온 쌀의 하역작업을 했던 조선인들의 거주지는 조계지 밖의 둔율동, 개복동의 산기슭이었다. 이러한 도시공간의 이중구조는 일본인을 위한 사회간접자본 정비와 더불어 민족적, 계층적으로 심화되었다. 군산 시가지는 지배와 피지배, 개발과 소외라는 이중성을 가지며 확대 되었다.
탁류의 시대
  • 일본인 지주들의 삶
    • 군산개항이후 일본은 목포영사관 군산분관을 설치했고, 1906년 군산 이사청이 운영되며 군산에서 일본인들의 독점적 권력이 강화되었다. 이후 일본인들은 식민권력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군산에 정착하여 부를 축적해갔다. 개항초기 군산에 온 일본인은 생계형 이주가 다수를 차지하는데 행상이나 소매점을 통해 일본제 잡화와 주류제품을 취급했다. 사업투자형 이주는 다른 개항장과 비교해서 비중이 높은 편이었는데, 이들은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은 농업경영자와 미곡상 그리고 건축청부업자들이었다. 1910년 강점이후 일제의 정책이 강화되며 일본인 가족단위의 영구거주가 많아졌다. 특히 농장을 운영하는 지주들의 이주가 많았으며 일본지주의 진출에 발맞추어 농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이주 역시 늘어났다.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의 실시에 따라 미곡 수탈량이 급증하면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커다란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1930년대 통계를 보면 군산부의 토지 중에서 80%가 일인의 소유였고, 옥구지방의 경우는 농경지의 60%가 일본인의 소유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여기에 농장을 설립했다. 일본인들의 농장은 대개가 철도인근에 설립되었으며 수리조합을 통하여 저수지와 수리시설을 정비했다. 농장은 이윤의 극대화를 꾀하는 기업형 경영(농장주-지배인-주임-소작농민)으로 이루어졌다. 일본인 농장주는 식민권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생산력의 증진과 농민의 노동력을 수탈하는 공장시스템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 조선인 농민, 노동자의 삶
    • 일본인 농장이 확대되면서, 조선 농민이 설 자리는 점점 사라져갔다. 일본인 지주들은 군산농사조합을 통해 대량으로 땅을 사들이거나 간척 사업을 통해 농장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조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 되었다. 일본인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마음대로 이주시키고, 그들의 생활을 오로지 쌀 증산을 위해 통제하고 감시했다.
      농촌에서 쫓겨난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왔고, 허름한 토막집에서 살며 노동을 통해 생계를 잇는 빈민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군산은 토막민이 도시 면적비율로 보아 전국에서 가장 많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정미공장의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나 관리자의 폭력과 수탈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그러나 군산사람들은 농민조합이나 노동조합, 야학 등을 통해 힘을 모아 일제의 수탈에 대항했다.
저항과 삶
  • 의병항쟁
    • 일제의 침탈에 대항하던 의병운동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그 중에서도 호남의병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군산 출신의 임병찬이 대표적이다. 임병찬은 최익현의 제자로 1906년에 최익현과 함께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의병운동을 멈추지 않아, 1912년에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탄로나 1914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거문도에 억류되었고 1916년 그곳에서 순국했다. 이밖에도 이 지역 출신 의병장으로는 고봉민(옥정리), 이준영(나운동), 문형모(임피면 월하리), 김덕장(미룡동), 김두안(미룡동), 전오풍(수산리) 등이 있다.
  • 계몽운동
    • 개항 후 군산으로 몰려오는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개항장의 조선 상인들은 옥구군산항민단을 결성했다. 이 단체를 매개로 하여 계몽단체인 대한협회의 군산지부가 설립되어 교육과 산업발전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객주들이 모여 만든 군산항객주상회사는 국채보상운동을 함께하며 대한제국의 재정 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군산의 계몽운동은 여러 교육기관의 설립을 이끌어냈는데, 옥구군산항민단의 후원을 받은 금호학교가 대표적이다. 1909년 12월, 금호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일진회의 한일합방 청원서에 반대하는 성명을 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호학교는 일제의 식민정책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 3·1 만세운동
    • 고종의 장례일에 맞춰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대되었는데, 군산에서는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전킨(W. M. Junkin) 목사가 세운 영명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3.1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영명학교의 졸업생인 김병수가 몰래 그 학교 교사인 박연세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독립선언서 3,500장을 인쇄해 3월 6일 설애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일본 경찰이 알아차리자 거사를 하루 앞당긴 5일에 군산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5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5월까지 계속되어 총 21차례 진행되었고, 참가한 연인원은 2만 5천이 넘었다. 이는 군산의 조선인 한 명이 최소 4번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것과 같은 수치이다. 이후 영명학교의 학생들은 공주, 강경 등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해 만세운동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 1920년대 노동운동
    • “먹드래도 같이 먹고 굶드래도 같이 굶자!”
      군산에는 개항초기부터 부두에서 하역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회사와 조합의 성격을 혼합시킨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었는데, 1920년대 들어서 30여개에 달하는 다양한 노동조합이 만들어져서 활동했다. 군산은 노동운동의 중추지대로 불리며 군산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은 전국적인 노동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일본인들은 비슷한 노동에 종사하는 조선인 노동조합을 상호 경쟁시켜 조선인 노동자를 통제하고 임금을 낮추려고 했으므로 군산노동조합의 가장 커다란 과제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는 것과 조선인들이 협력하여 일을 배분하는 것이었다. 군산철도노동회와 군산정미인접조합은 군산노동운동을 대표했다.
  • 옥구농민항쟁
    • 군산의 농민들은 가혹한 일본인 지주의 수탈에 맞서 저항했다. 그 중에서도 1927년 11월에 옥구 서수면의 이엽사(二葉社) 농장에서 일어난 옥구농민항쟁은 대표적인 소작농들의 저항이다.
      옥구농민항쟁의 원인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였으며 소작농들은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며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인이 계속해서 75%의 소작료 요구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소작농들이 구한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옥구농민항쟁은 조선인 소작농이 소수의 지도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일본인 경찰에게 직접 맞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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